1965년 4월 1일 사적 제145호로 지정되었다. 둘레 1,684m. 모양성(牟陽城)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백제 때 모량부리였던 것에서 유래된 듯하다. 축조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며, 계유년(癸酉年)에 호남의 여러 고을 사람들과 힘을 합쳐 축성하였다고 성벽에 새겨져 있다.
단종 원년(1453) 계유년에 세워진 것이라고도 하며, 숙종 때 이항(李恒)이 주민의 도움으로 8년 만에 완성시켰다는 설도 있도 있어 확실하지 않다. 반등산(半登山)을 둘러싸고 있으며, 동·서·북의 3문과 치(雉) 6곳, 수구문(水口門) 2곳, 옹성(甕城) 등이 있다.
조선시대 읍성에서 흔히 보이는, 육축(陸築)에 홍예문(虹樓)를 세우는 방식과 달라, 성곽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북문은 2층처럼 생긴 다락집이고, 아래층 어간(御間)에 문짝 둔테구멍이 있다.
서문터는 1976년 발굴되어 기둥초석과 문짝 달던 위치가 확인되고, 동문터도 기둥초석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이러한 성문 구성은 다른 유구(遺構)에서 아직 조사된 바 없어 성벽과 문루(門樓)와의 접합에 대하여 밝히지 못하고 있다.
성벽은 비교적 잘 남아 있고, 자연석은 거칠게 다듬어 썼는데, 초석·당간지주(幢竿支柱) 등을 깨뜨려 쓴 것도 있다. 고창의 성벽 밟는 놀이는 성가퀴 뒤의 성로(城路) 때문에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
단종 원년(1453) 계유년에 세워진 것이라고도 하며, 숙종 때 이항(李恒)이 주민의 도움으로 8년 만에 완성시켰다는 설도 있도 있어 확실하지 않다. 반등산(半登山)을 둘러싸고 있으며, 동·서·북의 3문과 치(雉) 6곳, 수구문(水口門) 2곳, 옹성(甕城) 등이 있다.
조선시대 읍성에서 흔히 보이는, 육축(陸築)에 홍예문(虹樓)를 세우는 방식과 달라, 성곽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북문은 2층처럼 생긴 다락집이고, 아래층 어간(御間)에 문짝 둔테구멍이 있다.
서문터는 1976년 발굴되어 기둥초석과 문짝 달던 위치가 확인되고, 동문터도 기둥초석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이러한 성문 구성은 다른 유구(遺構)에서 아직 조사된 바 없어 성벽과 문루(門樓)와의 접합에 대하여 밝히지 못하고 있다.
성벽은 비교적 잘 남아 있고, 자연석은 거칠게 다듬어 썼는데, 초석·당간지주(幢竿支柱) 등을 깨뜨려 쓴 것도 있다. 고창의 성벽 밟는 놀이는 성가퀴 뒤의 성로(城路) 때문에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